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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을 생각하는 시민모임(하시민)과 한일관계사학회에서 지난 2000년 6월에 주최한 유길준 선생에 관한 국제학술회의를 계기로 많은 국내외의 저명 역사학자들과 교분을 쌓는 행운이 있었다. 여기엔 하남시사편찬위원회의 상임위원이었던 김세민 박사와 하시민의 최달경 사무처장의 역할이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음을 밝히며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만나 본 역사학자들의 대부분은 각자의 전문분야가 따로 있었지만 한가지 공통적인 점은 모두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강원대 사학과 교수이자 박물관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손승철 교수의 역사에 대한 정의는 역사학에 문외하던 나의 눈을 새롭게 뜨게 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거울이다”

이 말을 손교수가 처음으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말에서 나는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역사야말로 진실 그 자체인 것이며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지침서이자 반면선생인 것이다.

역사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들도 실은 과거 어느 때 어떤 사람이 먼저 펼쳐 놓은 것일 수 있다. 이미 이루어진 일들이며 이미 주장한 내용들이며 이미 하나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것들이다. 어쩌면 나의 것은 앞서 간 사람들의 작은 모방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말 한 마디라도 함부로 꺼내는 법이 없다. 자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로 그들은 추리나 근거 없는 말을 뱉어내지 않는다. 괜히 어설픈 주장을 하였다가 그들에게 망신당하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정치인들을 신랄히 비판하는 편에 속한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되는 대도 떠들었다가 다시 주워 담는데 능수능란한 한국의 정치인들의 습성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역사학자들의 공부량은 타 학문에 비해 몇 배 더 한 것 같아 보였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 학술회의나 세미나, 자기가 속한 사학회 등에서 그들은 쉼 없이 자신의 학문적 성과물을 발표해야 하고 경쟁자들로부터 검증 아닌 검증을 받아야 한다. 어떤 때는 낯 뜨거울 정도로 다른 학자들의 논문이나 학설을 비판하고 망가뜨리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그래도 그런 것들은 아주 오래된 관습 또는 전통인 양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 그들만의 토론문화가 있고 그들만의 대화 방식이 있고 그들만의 주장과 비판이 있고 독설과 고집이 있다.

간혹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실패자로 보일 때도 있다. 자신이 속한 세계와 보통사람들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늘 자신이 하던 방식대로 사람을 대할 때는 저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인지 헷갈리게 한다. 특히 매우 이기적인 태도를 보일 때나 상대를 배려치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의 무기로 상대를 공격하고 세상사를 논할 때는 세상일에 너무 경험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우리네는 보통사람들이랑 어울리기 좋아하고 이런 저런 얘기로 자리를 매꾸지만 역사학자들은 자신의 얘기를 주로 함으로써 때론 좌석을 무료하게 한다. 그리고 다른 분야의 대화에는 시큰둥하게 반응하여 주변사람들을 난처하게 하는 역사학자도 있었다. 또 옛날의 어느 누구는 이러했고 이런 일들이 있었는데 지금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논리를 펴면 대항할 여지가 없지만 웬지 고리타분하고 딱딱한 분위기가 일순 감돌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로부터 역사의식이 왜 삶에서 있어서 중요한 것인가를 톡톡한 신고식을 치루고서 체득하게 되었다.

“박의원님, 지금 하시는 일들이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모 대학의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모 역사학자가 술좌석에서 내게 툭 던진 이 말이 나의 폐부를 파고 든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이 말도 첨부했다.

“비록 국가적 차원에서의 역사는 아닐지라도 하남의 역사도 역사입니다. 박의원께서 하남의 역사에 어떤 인물로 기억될지 지금이라도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고 내게 충고했다.

그렇다. 내가 걸어온 길, 내가 행한 일들, 내가 발언한 모든 말들이 작게는 나의 가족들에게 나아가 하남시민들에게 어떻게 기억될지 나는 몹시 두려운 것이다. 역사는 그 이후부터 나에게 무서운 존재로 가슴 깊숙이 뿌리 내려 있다.

E.H.카라는 역사학자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결국 인간은 과거의 자신을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을 준비하는 존재라고 했다.

어떤가? 나는 내가 걸어온 나의 삶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