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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원(永遠)은 없다?

사라가 증조인 안토니아에게 이렇게 물었다.

“영원이라는 것이 없어서 슬프지 않으세요?”

“그래서 많이 존재하는 거란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의 한 토막이다.

많은 이들이 영원에 대하여 궁금해 한다. 그리고 영원해 지고 싶어 안달한다. 세상에 영원한 존재가 있을까? 영원한 존재가 되는 길이 있을까? 실제로 그걸 시도한 사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중국의 진시황은 자신의 권력이 미치는 땅 끝까지 사람들을 보냈지만 허사였다. 처음부터 불로초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엔 생명공학, 유전공학 등이 활개를 치고 있다. 유전조작으로 기이한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일들이 다반사이다. 이 모두 궁극적인 목적은 단 얼마마의 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인간의 집요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1년, 10년, 20년 씩 생명을 연장하다보면 결국에는 영원히 사는 길을 찾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욕심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육신의 삶이 그렇게도 중요하느냐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육적인 삶이 전부라면 육을 버려야 영생을 얻는다는 예수 그리스도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일테다. 과연 그럴까?

원래 진리는 단순하고 간명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영원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의 진리는 그렇게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가 아님을 예수께서 이미 가르쳐 주셨음에도 아직도 사람들은 스스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하고 엄청난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2. 페로몬(pheromone) 있어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개미>를 만날 때까지 개미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라곤 그저 이솝이야기의 등장인물이거나 또는 부지런한 동물을 이야기할 때 흔히 꺼내곤 하는 단골메뉴 정도였다. 그런 개미가 놀랍게도 페로몬을 이용, 자신의 감정을 다른 개미 에게 전이시키는 특출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사전에서는 페로몬을 “동물의 체내에서 생산되어 체외로 방출하여 같은 종류의 개체 사이에 특유한 행동이나 생리작용을 일으키는 물질”이라고 적혀있다. 이에 비해 호르몬은 외부와 교류하지 않고 몸 안에서만 순환한다는 특성이 있다. 인간이 두려움이나 즐거움이나 분노를 느끼면 내분비 샘에서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심장박동이 빨라지려 하거나 땀이 나려 하거나 얼굴을 찡그리려 하거나 울려고 하는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즉 호르몬이 바깥으로 분출하면 그것이 페로몬이 된다는 것인데 인간에겐 사랑의 페로몬이 실재하고 사랑하는 사람끼린 이 페로몬의 작용이 귿대화되어 감정이입과 교류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혹여 이 페로몬의 맛을 보지 못하고 사는 불쌍한 인간들은 없는지 괜한 걱정을 해 본다. 왜냐면 사람이 싫다며 혼자의 생활을 고집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3. 작은 그릇

거만하기 짱기 없는 유명대학의 한 교수가 불심이 깊기로 명성이 자자한 스님과 한판 겨루기로 작정하고 사찰을 찾았다.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마주 앉아 찻잔을 교수에게 건넸다. 그런데 찻잔이 넘치는데도 스님은 계속해서 교수의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이에 그 교수는 속으로 이 스님이 분명 노망이 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스님 찻물이 넘칩니다.’고 말해 주었다. 그 러자 스님은 또 한번 빙그레 웃으며 “이 사람아, 찻물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자네 그릇이 작아서 그런거지”하고 말했다. 그제야 그 교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크게 뉘우치고 스님에게 큰 절을 세 번 올리고 물러나 뒤에 훌륭한 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고 성경에도 거만과 교만은 멸망의 뿌리라고 했다. 토인비도 권력의 장악과 몰락의 과정을 설멍하면서 과식(surfeit), 거만한 행위(outrageous beha vior), 재난(disaster)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거만한 사람치고 멸망치 않은 사람이 없다. 특히 그릇이 작은 사람일수록 거만한 경우가 많음을 볼 때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어쩌면 그렇게 신선한 충격으로 나를 긴장케 할까.


4. 절망의 패러다임

에른스트 올리히 폰 바이츠제커의 <환경의 세기>라는 책에 세기말의 뜻을 가진 팽드 시에클(fin de siecle)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사회 및 예술 전반에 걸쳐 퇴폐적인 몰락 현상이 나타난 19세기 말엽에 대한 별칭이기도 하다.

역사상 세기말에는 늘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된다. 즉 21세기는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의 전망이 밝다고 하고 지난 세기가 경제적 패러다임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환경 또는 자연의 희소성이 우리 삶의 중심적인 동기가 될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었다.

우리의 삶 속에 절반은 절망이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철학자는 절망이 희망을 낳는다는 역설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절망은 모든 것을 앚아 갈 뿐이다. 고통과 눈물을 수반하고 방탕과 비관과 무기력의 사생아를 낳을 뿐이다. 특히 절망은 세기말의 특징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주변에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대개의 원인이 물질적인 것에 있다는 것이다. 물질에 목표를 두고 사는 그들은 물질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물질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 물질에 매여 있는 한 절망의 패러다임은 절대로 변화하지 못하고 그의 족쇄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물질 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칠전팔기도 있다. 절망만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성취 할 수 있다는 손문의 어룩을 간직할 필요가 있다.


5. 숨

살아 있다는 것은 숨이 아직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숨은 생명의 근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숨은 과연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이 성경의 창세기 2장 7절에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성경 외에 생명의 긴원에 대하여 자신 있게 언급한 것은 없다. 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들의 교리나 주장들은 생명이 있고 난 다음의 문제에 대한 언급일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격식과 행위, 깨달음들에 대한 그들의 언급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숨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숨이 그냥 저절로 만들어 졌다고도 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우리가 모르는 문제일 뿐이라고 한다.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어물쩍 넘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나를 태어나게 한 부모님의 존재는 중요치 않다는 말과 같다.

숨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고 동물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사람은 숨의 존재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며 살아야 한다. 더욱이 숨을 만드신 존재가 있다면 사람은 그 분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가 다른 이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신세를 입으면 그것에 대하여 보답을 하고자 한다. 세상적인 은혜에도 이럴진데 생명에 대한 은혜를 생각지 않고 산다면 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은 이 숨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존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숨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그 분에게 나의 모든 것을 의존하고자 한다. 주신 분도 그 분이기에 거두시는 것도 그 분이심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의 죽음에 대하여 별로 두려운 마음이 없다. 육체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내 숨, 내 영혼은 그분의 것이기에 하루하루 건강한 숨, 고른 숨, 발고 명랑한 숨을 가꾸도록 애쓰는 것이다.


6. 사랑나눔

“비목만 될 수 있다면 내 어이 죽음을 마다하랴

원컨대 원앙이 되어 신선을 부러워하지 않으리“

비목은 암, 수가 각각 눈이 하나뿐인 바닷물고기의 이름이다. 눈이 하나이기 때문에 항상 암, 수가 나란히 헤엄쳐 다닌다고 한다. 또 원앙새의 금슬은 익히 알려진 것이다. 당나라 때 서울 장안에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는데 비목과 원앙처럼 사랑하고 살았다고 해서 후세에도 이렇게 한 줄의 시로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사는 동안에 행복할 수 있다.

사랑을 주고받음으로 하여 우리는 각자의 존재가치를 느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그 무엇보다 자신의 희생을 요구 한다. 희생이 클수록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묘한 생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아기 뱀이 있었다. 좀 이상한 뱀이었다. “너는 왜 개구리를 안 먹니?”하고 엄마 뱀이 물었다. “불쌍해서요. 내 친구거든요” 아기 뱀은 개구리하고도 놀고 들쥐하고도 놀았다. 엄마 뱀도 설득하다 지쳤다. “네 맘대로 해라. 먹을 것을 안줄 거야” 그러나 아기 뱀은 개의치 않았다. “왜 우리는 서로 잡아먹어야만 할까?” 아기 뱀은 어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기 뱀은 집을 나와 조그만 돌 위에 앉아있었다. 배가 점점 고파오고 아기 뱀은 몸을 움직이기가 어려웠지만 친구들을 끝내 잡아먹을 수 없었다. 할 수없이 아기 뱀은 자신의 꼬리를 조금씩 뜯어 먹다 그것도 모자라 제 살을 파먹은 끝에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리고 아기 뱀의 영혼은 영원한 안식처인 하늘나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아기 뱀같이 아무런 기쁨의 약속이나 보답에 얽매이지 않고 상대방을 전적으로 순수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사랑을 줄때 반드시 우리는 그 보답을 받기를 원한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에 이르면 더욱 보상의 심리가 강해진다. 자기가 준 사랑을 되돌려 받지 못하면 분노하고 그 사람을 원망히기 일쑤이다. 그리하여 중도에 파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빵을 사고 싶을 때는 동전을, 가구를 사고 싶을 때는 은전을, 토지를 사고 싶을 때는 금전을 지불하고 사랑을 사고 싶을 때는 당신 자신을 지불하라는 명언이 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라는 뜻이다.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사랑이 더욱 고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