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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농군학교의 창립자이자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막사이상 수상자이신 김용기 장로님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한 분이다.

당시만 해도 황산(荒山)은 이름 그대로 황량한 벌판에 불과한 곳이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이 땅이 김장로님과 인연을 맺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는가. 그 때 김장로님은 봉안이상촌과 에덴향을 설립, 운영해 오다가 황무지를 개척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일구고자 하는 새로운 꿈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것은 신앙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부여받은 계시적 사역이었으리라.

1945년 11월 16일. 드디어 김장로님은 구약시대의 아브라함의 행렬과 너무도 흡사한 모습으로 사모님과 장남 종일, 차남 범일, 삼남 평일, 장녀 활난, 차녀 찬란의 일곱 식솔을 거느리고 이곳 황산으로 이주해 왔다. 내가 12살 때였고 그 땅이 바로 우리 집의 땅이었으며 이것이 나와 김장로님이 맺은 첫 인연이 된 것이다.

보통사람은 고난을 자처하지 못한다. 평범한 이들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행복의 충분조건이자 목표인 것으로 여긴다. 잘 먹고 잘사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생의 참가치를 느낄 수만 있다면 부족함이 없겠지만 진정한 인생의 가치는 물질의 세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기에 사람들은 무언가 새로운 세계에 몰두하는 것이다. 마치 고난을 친구처럼 여기며 고난을 즐기기까지 하는 것은 아닐까? 장로님이 황산의 메마른 땅 위에 처음으로 시작한 일은 고구마를 심는 일이었다. 쌀도 아닌 고구마는 장로님의 사상 저변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물질이요 고난의 대변자였다. 그것이 주식이었고 그것으로 먹는 문제가 일단 해결된 셈이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집과의 고분이 쌓여갔다. 특히 나의 모친과 장로님의 사모님은 친 오누이처럼 친하게 지내셨다. 아마 모친의 근검절약정신과 사모님의 처지가 일맥상통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몇 년뒤,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것이 김장로님과 또 한번의 인연으로 맺어질 줄은 꿈에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경신 중, 고등학교는 기독교학교였고 싫든 좋든 6년간은 의무적으로 성경공부를 해야만 했다. 특히 곤혹스러운 것은 주일마다 교회예배를 보았다는 확인도장을 목사님으로부터 받아 학교에 제출하는 일이었다. 그 때, 철부지인 내게 구세주 같은 분이 바로 장로님이었다. 예배를 보든 안보든 교회에 나가기만 하면 장로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도장을 잘도 찍어 주셨다. 내 짝꿍은 가짜 도장을 찍어가 선생님에게 얼마나 혼쭐이 났던지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곤 했다. 혹, 시험기간이나 꾀부림으로 주일예배를 빼먹는 날에는 장로님에게 어리광을 부리거나 교회에 안나오겠다는 반 협박조로 떼를 쓰면 은근슬쩍 화를 내시는 척하면서 어린 나의 손에 확인서를 집어 주시곤 하였다. 그 때의 인자한 미소와 부드러운 말씀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것이 두 번째의 인연이다.

한편으로 김장로님은 특이한 분이셨다. 마을사람들은 아예 별 이상한 사람이 들어와서 천막을 치고 생활한다고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장로님은 매일 자식들을 앞세우고 트럼펫과 큰 북을 치며 마을을 돌아다니셨으니 마을 사람들은 무슨 약장수로 오인한 것이다. 그것이 선교활동이요, 농촌계몽활동의 시작이었음을 알 턱이 없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건국초기에는 농촌이 발전해야 나라의 기틀이 잡히는 법이라고 장로님은 역설했다. 농촌이 깨어나야 나라가 살고 민족이 살고 우리가 산다는 부르짖음을 장로님은 장소를 불문하고 외쳤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으니 그 소리가 바로 농민이여 농군이 되라는 말씀이었다. 전쟁을 위한 군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농촌을 살리는 군대도 필요하다는 장로님의 사상이 현실화된 곳이 바로 가나안농군학교인 것이다.

농군학교의 이름은 급속도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각계각층의 교육생들이 장로님의 농군학교로 입소하여 근로, 봉사, 희생의 정신을 배워갔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황산의 적막은 교육생들의 구보소리에 깨었다. 장로님의 쩌렁쩌렁한 호령소리를 듣지 못하는 황산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 어느새 장로님은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어갔다.

그런 장로님의 힘의 원천은 말할 것도 없이 신앙심이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그리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행하며 사명의식에 투철한 신앙심은 가히 범접하기 힘든 경지였다.

“ 큰 이상을 마음에 가지고 영원무궁한 세계를 향해 걸어가라” 이것이교육생들에게 빼놓지 않고 들려주던 호소였다.

그렇다고 가나안농군학교의 출발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마을 사람들의 배타적인 태도는 가장 큰 짐이었다. 덩치가 커져가자 동네 사람들은 농군학교가 지역을 위해 무언가 큰 선물이라도 내놓을 줄 알고 은근히 기대했다. 그러나 전국적인 유명세에 비해 농군학교가 사람들의 욕심들을 채울 수 있을 만큼의 선물을 주지 않자 불만이 일었다. 다른 곳에는 잘 해주면서 정작 우리 동네를 위해서는 농군학교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는 식의 불만을 노골적으로 털어놓았다.

또 전통적으로 유교문화와 토속신앙에 익숙해 있던 마을사람들에게 기독교신앙은 매우 낮선 것이어서 쉽게 동화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이질감으로 계속 존재했던 것이다. 특히 밀양박씨의 집성촌이었던 황산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매우 터부시했다. 그런 문화 속에서 유일하게 기독교학교를 다니고 있던 나를 유달리 총애하고 지대한 관심을 장로님이 가지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월은 덧없이 흘렀고 어느새 나는 사회인으로서 고향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황산검문소 아래의 스레트 지붕을 한 블록집이 내가 금강스레트 대리점을 운영하던 곳이었다. 장로님과의 만남은 아주 오랜 세월의 간격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갈 무렵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전히 내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흰 눈발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집 안에서도 손을 호호 불며 앉아 있어야 할 만큼 추운 겨울의 오후였다. 대리점 앞으로 까만 짚차 한 대가 멈춰 서는 것이었다. 눈여겨볼 여유도 없이 차문이 열리며 얼굴을 나타낸 사람은 다름 아닌 장로님이었다.

족히 십여 년의 세월이 우리 두 사람 앞에 가로놓여 있었지만 장로님은 그런 생각도 없는 듯 보자마자 차에 타라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가보면 안다고 하시며 그저 빙그레 웃으시기만 하였다. 시간 반쯤 차는 달리고 있었다. 철길이 나오고 굴다리도 지나더니 어느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산 중턱 쯤에서 차는 멈춰 섰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곳이 바로 강원도 신림이라는 곳이었고 후에 제2농군학교가 들어선 곳이었다. 장로님은 매우 흥분된 얼굴로 그 자리에서 내게 앞으로의 계획과 자신의 포부를 정신없이 털어 놓으셨다. 어느 성도분이 희사한 땅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놀라운 역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로님은 이곳에 농군학교가 들어서면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니 날더러 부지런히 교회도 나오고 신앙생활을 착실히 하라는 당부를 하시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그때까지 기독교는 그저 철학적인 탐구의 대상이었고 신앙이라는 것도 추상명사에 불과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장로님은 내게 많은 기대를 하신 것 같다. 시골 촌구석에서 태어나 대학물이라도 먹은 젊은 청년에게 나름대로의 참다운 삶을 인도하려 애쓰신 것 같다. 그럼에도 장로님의 바램대로 내가 신앙인이 되지 못하자 답답한 심정을 자주 토로하며 나를 신앙의 길로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교회에 무조건 열심히 다니라고 강권도 했다. 그러다 보면 우연히 믿음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닫혀진 내 마음은 그리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어느 날 좋은 규수감을 소개시켜 준다고 해서 선까지 보게 되었다. 신앙심 깊은 아내와 살다보면 나도 덩달아 믿음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을 것이다. 보육대를 나온 가나안 유치원 선생님이었는데 몇 번의 형식적인 데이트 끝에 마감을 지었다. 내가 신원보증을 설테니 결혼하면 좋겠다고 은근히 압력을 넣으시던 장로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장로님의 그 줄기찬 짝사랑을 팽개치고 나는 계속 나대로의 인생의 길을 걸었다. 결국 장로님은 신앙인으로서 나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장로님의 그 애끓던 바램을 거절한 내 자신이 무척 원망스럽다. 그러나 장로님의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닐 성싶다. 나이 육십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예수를 알게 되고 신앙이 무엇인지에 눈을 뜨게 되었으니 늦었지만 장로님께 보답하는 기분이다.

그 뒤로도 장로님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집안의 장손으로서 내 결혼에 대한 집안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맞선을 보고 보았지만 쉽사리 나의 배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당숙모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천호동의 ‘그다방’에 양가친척이 함께 한 자리에서 결혼 약속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주례는 장로님의 몫이었다. 으레히 그렇게 해 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장로님이 다른 사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 나는 너무 놀랐다. 나에게 실망감이 커 그런 것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숭전대학 교 안병욱 교수님을 주례선생으로 소개받기 전까지 당연히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짧은 내 생각이었다. 장로님이 안교수님을 주례선생으로 굳이 소개한 것은 새로운 안목을 넓히는 계기를 가졌으면 하는 배려였다. 장로님이 아니었으면 나 같은 필부가 대한민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석학을 어찌 주례선생님으로 모실 수가 있었겠는가. 장로님의 그 깊고 넓은 사랑을 어찌 보답 할 수 있을까.

결혼 후에도 장로님은 나와 내 아내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보이셨다. 있는 집안에서 대학 공부까지 마친 아내는 속된 말로 손에 물 한 방울 적시지 않고 곱게 자란 공주 같은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농촌의 종가 집에 시집왔으니 그 괴로움이야 오죽했을까. 아내의 생활방식은 완전히 무너졌고 거의 절망이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환경의 차이는 너무 심각한 것이었다. 그 때 장로님이 내게 아내를 농군학교에 보내라고 하셨다. 임신 중인 아내를 스파르타식의 교육장으로 위세를 떨치던 농군학교에 보내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장로님의 특별 지시를 거역할 수는 없는 일, 뒤에 아내의 고백이지만 아내는 입소 후 다른 남자 교육생들과 똑 같이 훈련받고 생활했다고 한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구보도 하고 빵 한 조각 우유 한 컵, 사과 한 쪽으로 식사하는 것도 똑같이 했다는 것이다. 훈련을 마친 후 아내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공주에서 주부로,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로 탈 바꿈 한 것이었다. 만약 그 때 장로님의 그런 배려가 없었다면 아내가 그 힘든 종가 시집살이를 견디며 지금까지 나와 부부의 연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다. 이 모두 장로님의 은혜임을 뒤늦게나마 깨닫는다.

기독교정신은 사랑이요 헌신이다. 받는 것 없이 끝없이 내게 주시기만 했던 장로님은 철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사랑의 실천자이셨다. 그런 분이 내 인생의 길에 존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비록 장로님의 뜻대로 내가 따르지 못했지만 장로님의 희생과 헌신의 정신은 분명히 내게 남아 살아 숨쉬고 있으며 오늘의 나를 지켜주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