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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의 한 켠에는 내 가문의 13代 선조이신 일옹 박경응 할아버지의 문집 <일옹집(一翁集)>이 늘 꽂혀 있다. 시도 때도 없이 꺼내 펼치기를 수십 년이다 보니 닳고 닳았다. 마음이 어지럽고 생각의 갈피가 잡히지 않을 때면 선조의 문집으로 마음을 추스른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고명한 분은 아니지만 그 분의 고결한 삶은 오늘의 나를 지탱케 하는 큰 힘이 된다.

기록에 一翁 朴慶應(1587-1667)은 현감벼슬을 지낸 信과 전주 이씨 어머니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고 일찍이 배움을 터득하여 중용과 대학을 외우고 글 읽기와 쓰기를 좋아했으며 나이 26세 에 합격하여 가원능참봉에 보임되고 종묘부봉사와 상서원 부직장에 전임된 후, 금오랑에 승진되었다. 1636년 (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갈 때, 금오랑으로 왕을 모신 大를 호위하여 왕의 은총을 받았으며 이후 안산, 제천, 정선 등의 군수를 역임하였다. 일옹은 청백하고 근면하여 벼슬을 마치고 돌아올 때 행장이 늘 쓸쓸하였고 매일 새벽마다 에 배알하고 검약했으며 만년에는 자손을 가르치고 서적을 탐독하며 지냈으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와 마음가짐의 수양에 힘써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한다. 80세를 향수하였으며 계묘년 11월에 성남에서 생을 마쳐 광주부 북무산에 안장되었다. 자녀는 5남4녀를 두었다. 는 경응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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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옹집’은 1616년부터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때, 아마 과거 급제 이후부터 전 생애에 걸쳐 필묵을 놓지 않은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4권의 시문집으로 엮어졌으나 이권이 벽지로 소실되었다.

이에 9세손이신 하원이 ‘일옹공의 문집이 얼마 안 되어 다 없어지고 말터인측 이것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집의 양반가문이 일옹공으로부터 나왔거늘 자손이 되어 어찌 유고를 등한시할 수 있겠느냐’고 한탄하며 종중과 함께 재물을 거두어 1863년(철종14) 7월 17일부터 8월 19일까지 하원이 필역. 필사본이 남겨지게 된 것이다.

이후 13세손인 삼진이 시문집을 출판하고 시비를 세웠으며 1990년에는 시인 박재륜과 그의 친우 김용준, 정태학 등 두 시인이 공동작업을 펼쳐 드디어 한글번역의 일옹집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남시 풍산동 산97번지에 있는 시비는 고 이철재 초대 하남문화원장의 시비건립 발의에 따라 일옹집에서 대표작을 골라 1993년 3월에 새긴 것이다.

일옹의 시는 격이 부드럽고 담박하여 치장함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려하고 꾸미는 표현은 없으나 넉넉하고 거침이 없는 문장으로 평소의 청백하고 바른 성정이 시에 잘 드러나 보인다.

시인 황산 김용준은 <一翁 >에서 일옹의 시들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彫飾(조식:잘 다듬어 치장함)을 일삼지 않으므로 擊力(격력: 필력)이 부드럽고 담박하여 화려하고 震耀(진요: 수려하고 매끈함)한 文가 절대로 없었으며 한결같이 성정의 바른데서 나와서 風雅(풍아)의 체제를 잃지 않았다. 문장 역시 聃富(담부)하고 창달하며 하여 에 자연히 맞었다‥‥‥(중략)”

여기서 “동쪽 고향을 그리며”라는 한 편의 시를 소개해야 되겠다.

늦은 공명에 쓴 웃음을 지으며
그래도 세상사를 떠나지 못하네
어제밤 꿈에 본 고향산이 좋으니
소나무 구름 깊은 곳에 쉼이 마땅하리

마음과 개울의 벗들이 더딘 날
보고 웃겠네
만사 몸 편한 곳을 찾다 보니
백수의 낭관벼슬이 실로 마땅치가 않네
어찌하여 오늘날은 태평치가 않은가
해마다 겪은 난리가 한스럽네
서울엔 가난, 시골엔 괴로움이 많으니
궁한 선비 살 곳이 없네

궁한 처지에도 나라 생각하는 일옹 선조의 심사가 잘 나타나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런 어른의 성정과 피가 내게로 이어졌으니 나 또한 한 평생을 바르고 청백함으로 살아야 되겠다는 의지를 늘 일깨워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