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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석의 개요

고인(故人)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문장을 새겨 넣은 돌을 비(碑) · 빗동 · 석비(石碑) 등 여러 명칭으로 일컬으며, 거리에 새겨 넣은 글을 금석문(金石文)이라 하여 귀중한 사료(史料)로 사용된다.

우리나라의 비석이 언제부터 세워졌는지 확실치 않으나 고구려 때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등은 역사상 자랑할 만한 비석이다.

비석의 종류도 묘비(墓碑) · 능비(陵碑) · 신도비(神道碑) · 순수비(巡狩碑) ·정려비(旌閭碑) · 송덕비(頌德碑) ·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들이 널리 알려져 있는 비석의 종류이며, 이 외에는 기적비(紀蹟碑)도 여러 종류가 있다.

2. 신도비 개관

왕이나 고관(高官)의 무덤 앞에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을 일컫는데, 대개는 무덤 동남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운다.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신도비는 중국 한(漢)나라에서 비롯되어 당시는 종2품 이상의 관계(官階)를 지녔던 사람에 한해서 세웠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부터 세웠다고하나 전하는 것이 없고, 조선시대 5대 임금인 문종(文宗)은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고, 공신(功臣)이나 석학(碩學) 등에 대하여는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우게 하였다.

3. 하남의 신도비 개괄(槪括)

하남에는 현재 공식적으로 조사된 것만 10여기의 신도비가 있다. 그러나 모든 신도비가 문화재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 신도비가 세워진 연대, 비문을 지은 사람, 글씨를 쓴 사람 등을 살펴보아 사료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것들을 약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밀성군(密城君) 신도비
밀성군 묘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20m 거리에 있다. 1660년(선조 33)에 세워졌으며, 조선시대 문신(文臣)인 서거정(徐居正)이 글을 짓고(撰) 안침(安琛)이 글씨를 썼다.
향토유적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밀성군은 세종의 12번째 아들로 다섯 번째 庶子이다. 이름은 침(琛)이고 자(字)는 문지(文之)이다. 밀성군은 타고난 성품이 현명하고 민첩하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정중하여 집에 첩을 두지 않았고 법도를 지켰다고 한다.

성종(成宗)이 시호(諡號)를 장효(章孝)라 하였고, 1782년(정조 6)2월 효희(孝僖)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덕평군(德平君) 신도비

덕평군의 묘로부터 서쪽으로 5m 아래에 세워져 있으며, 귀부(龜趺)와 이수(?首)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비문에는 「德平君墓碑銘 嘉靖十九年子八月」이라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 비석이 세워진 연도는 연호인 가정(嘉靖)에 의해 1540년 8월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석재는 화강암이다.

◈ 운산군(雲山君) 신도비

운산군묘로부터 서쪽으로 10m정도에 있다. 비신에 「正德十三年 戊寅四月二十八日」이라 새겨져 있어서 이 신도비가 1518년 4월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문신인 남곤(南袞)이 글을 지었다. 이수(?首: 건축물이나 공예품에서 뿔 없는 용이 서린 모양을 새긴 형상)부에는 용문양(龍紋樣)이 그대로 잘 남아 있다.

운산군은 밀성군 이침(李琛)의 아들로 이름은 계(誡)이고 자(字)는 신옹(愼翁)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세조의 귀여움을 받았다. 일을 시행하는데 너그럽고 가혹하지 않아 종실(宗室:임금의 친족) 들이 공경하여 감히 잘못을 저지르지 못했다고 한다.

◈ 임문정(任文靖) 신도비

묘로부터 서쪽 50m아래로 있으며 비의 건립연대는 1708년 10월이다.

◈ 김위정(金威靖) 신도비

묘한 아래로 있는데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신석우(申錫愚)가 비문을 짓고 홍현주(洪顯周)가 전(篆)과 비문을 썼다. 비문에 「崇禎紀元後 四年癸亥」 라고 새겨져 있어서 1631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 민응협(閔應?) 신도비

묘로부터 남쪽으로 300m떨어진 창고 뒤 논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비문은 많이 마모되었고 막내아들인 민암이 비문을 짓고 오시복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崇禎紀元後 戊辰六十五年 壬申建立」이라 되어 있어 이 신도비가 1692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응협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字는 인보(寅甫)이고 호는 명고(鳴皐)이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자신보다는 자식들이 더 높은 관직에 올랐다. 첫째 아들 민희(閔熙)는 좌의정에 막내아들 민암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대사간(大司諫) 정계순(鄭啓淳) 신도비

묘로부터 서쪽 100m에 세워져 있다. 비문에 「승정기 원후 사갑오」라 하여 1834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황(李相璜)이 비문을 짓고 박종훈(朴宗薰)이 글씨를 썼으며 손자인 판서군(判書君) 정원용(鄭元容)이 전액(篆額:빗동의 위 부분에 쓰는 전서)을 썼다.

정계순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옥여(沃汝)이다. 그는 수시로 사람들에게 베풀었으며 관리가 하는 일을 하찮게 생각하지 않고 형벌을 너그럽게 하여 백성들은 그를 믿었다. 관리시절 흉년을 만나면 상급 관청에 진곡(賑穀)의 대출을 의논하여 곡물을 대출하였다. 또한 중대한 죄안(罪案)을 다룰 때 생사가 달려 있으면 사람 인(人)자 한 글자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좌의정(左議政) 유홍(兪泓) 신도비  

재실로부터 남서쪽 50m에 있으며, 신도비 비문에 「」이라고 새겨져 있어 이 비가 1813년 8월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도비는 다른 비석과 달리 붉은 색이나는 화강암이고 정방형인 것이 특색이다.

이조판서 장유(張維)가 비문을 짓고 자손인 유한지(兪漢지)가 글씨를 쓰고 전액(전액(篆額)을 썼다.

유홍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자(字)는 지숙(止叔)이고 호(號)는 송당(松塘)이다. 시호(諡號)는 충목(忠穆)이며 문집(文集)으로는 송당집(松塘集)이 있다.

여러 요직의 관직을 두루 거쳐 좌의정이 되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해주(海州)에 있는 왕비를 호종(扈從:임금의 거가(車駕)를 좇아서 따름)하다가 객사(客死)하였다.그는 천성이 너그럽고 인자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시문(時文)에 능하여 천여수의 시가 전해오고 있으며, 장서가(藏書家)로도 유명하여 만여 권의 책을 소장(所藏)하고 있었다 한다.

대제학(大提學) 정척(鄭陟) 신도비  
1504년에 세워졌으며 어세겸(魚世謙)이 비문을 지었다. 초이동에 있다.

좌부승지(左副承旨) 정성근(鄭誠謹) 신도비

초이동에 있으며 1534년에 세워졌고 정사룡(鄭士龍)이 비문을 지었다. 정성근은 조선중기의 이름난 효자였으며 그 가문에서 3대에 걸쳐 효자가 배출되었다.


선성군(宣城君) 신도비  

덕풍동에 있으며 1937년에 세워졌다. 이명상(李明翔)이 비문을 짓고 윤용구(尹用求)가 글씨를 썼다. 전(篆)은 민병석(閔丙奭)의 글씨이다.